주원장전
 
 도서분류 동양사
지은이 : 오함
옮긴이 : 박원호
면 수 : 524
:  \20,000
출간일 : 2003/06/30
판 형 : 신A5
ISBN : 89-423-2049-X 03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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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주문권수 입력:
 책 의   줄 거 리 ( 머 리 말 )
역자 해설:오함과 《주원장전》

1965년 11월 11일자 상해의 《문회보(文匯報)》에 실린 요문원(姚文元)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함〉이라는 글이, 중국에 엄청난 재난을 안겨 준 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의 도화선일 줄은 당시 어느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명조(明朝)의
가정제(嘉靖帝, 1507∼1566)가 파면한 청렴강직한 관리인 해서(海瑞, 1514∼1587)를 어떻
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라는, 표면적으로는 역사인물평가를 둘러싼 하나의 학술논쟁처럼 보
였다. 뒷날 4인방(四人?)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요문원이 매섭게 비판하였던 역사극 《해
서파관》의 작가가 바로 오함(吳?)이다. 저명한 역사학자이고 문인이며 정치인이기도 한 오
함은 그 무렵 북경(北京)시장 팽진(彭眞) 아래에서 부시장으로 있으면서, 시위서기(市委書
記) 등척(鄧拓), 통전부장(統戰部長) 요말사(廖沫沙)와 함께 이른바 ‘삼가촌(三家村)’그
룹을 이루어 주로 문필을 통한 정치활동을 펴고 있었다. 모택동(毛澤東)과 4인방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은 이렇게 《해서파관》의 작가 오함을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오함(1909∼1969)은 절강성(浙江省) 의오현(義烏縣)에서, 열다섯 남매 가운데 넷만 성장했
던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7년에 항주(杭州)의 지강대학(之江大學) 예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폐교되자 상해(上海)로 가서 중국공학(中國公學) 대학부에서 2년 동
안 공부하였다. 이 학교는 그 무렵 호적(胡適)이 교장으로 있었는데, 오함은 〈서한(西漢)
의 경제상황〉이란 논문을 써서 호적의 주목을 받았다. 호적이 북경대학 문학원 원장을 맡
아 1930년 북평(北平, 북경)으로 떠난 뒤에, 오함도 연경대학(燕京大學)에 입학하기 위해
북평으로 갔다. 중국공학에서 영어 성적이 좋지 못해 연경대학 입학에 실패하고, 북경대학
은 시험기간을 놓쳐 1년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동안 연경대학 문사(文史)연구원
인 고힐강(顧?剛)의 소개로 연경도서관에서 일하면서 공부하였는데, 이 기간에 〈호응린(胡
應麟)연보〉를 집필하였다. 다음해, 먼저 북경대학 역사계에 응시하였는데, 영어 성적은 좋
아졌으나 수학이 0점이었다. 그 무렵 북경대학의 규정은 국문·영문·수학의 3개 주과목 가운
데 하나라도 0점이 있으면 불합격 처리되었다. 다시 청화대학(淸華大學) 역사계에 응시하
여 성적은 마찬가지였지만, 우수한 국문과 영문 성적을 고려하여 학교 당국이 입학을 허가
함으로써 1931년 가을에 2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입학할 무렵 호적에게서 〈호응린연보〉를 받아 본 역사계 주임교수 장정불(蔣廷?)이 오함
에게 앞으로 명사(明史)를 전공해 보도록 권유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호적이 말한 ‘대담
한 가설, 세밀한 실증〔大膽假說, 小心求?〕’이란 연구방법을 가슴에 새기며 학문의 길로
들어선 오함에게, 친구들이 ‘태사공(太史公)’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전한다. 오함은
대학 재학 때에 이미 〈호유용당안고(胡惟庸黨案考)〉, 〈명말의 사환(仕宦)계급〉, 〈금병
매(金甁梅)의 저작 시대 및 그 사회배경〉을 발표하였고, 1934년 졸업을 바로 앞두고 하내
(夏홌)·나이강(羅爾綱)과 함께 사학연구회를 발족시키는 등 학술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다음
해, 사학연구회 연회(年會)가 청화대학에서 열렸을 때, 오함은 〈건문생모고(建文生母考)〉
를 발표하였다. 졸업한 뒤에는 청화대학 역사계의 조교로 있으면서 명사를 강의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글들이 〈명성조생모고(明成祖生母考)〉, 〈명대의 농민〉, 〈명대 정난(靖
難)의 역(役)과 국도(國都) 북천(北遷)〉, 〈명초 위소제(衛所制)의 붕괴〉, 〈16세기 전기
의 중국과 남양(南洋)〉, 〈명대의 군병(軍兵)〉 따위이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오함은 운남대학(雲南大學) 역사계로 옮겼는데, 다음해 파격
적으로 교수로 승진되었다. 그 다음해에 곤명(昆明)에서 북경대학, 청화대학, 남개대학(南
開大學)이 연합하여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을 만들자, 1940년에 서남연합대학으로 옮
겨 서영(敍永)분교에서 중국통사를 강의하였다. 1943년에 이른바 ‘애국민주당파’의 하나
인 중국민주동맹에 가입하여 주로 문필을 통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중국공산
당의 영향과 도움을 받게 되었다. 1943년 《바리때〔僧鉢〕에서 황권(皇權)까지》(승리출판
사 판본의 서명은 《명태조전》)를 출간하였는데, 이때는 주원장을 은근히 장개석에 ‘비추
어서 〔影射〕’ 서술하였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 1946년 상해를 거쳐 북평으로 가서 교수로서 정치활동도 하던 가운데,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1948년 일단 북평을 떠났다. 그러다가 1949년 인민해방군과 더불어
북평으로 되돌아왔다. 군관위(軍管委) 대표로서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을 접수하고, 청화대학
의 역사계 주임교수와 문학원 원장을 맡았다. 그 뒤에 주은래(周恩來)의 요청으로 북경시
부시장에 취임하였는데, 모자라는 시간 속에서도 꾸준히 역사평론을 써서 《독서찰기(讀書
札記)》, 《투창집(投槍集)》, 《등하집(燈下集)》, 《춘천집(春天集)》을 출간하였다. 또
명대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인 담천(談遷)의 《국각(國?)》을 출판하도록 도왔고, 자신도
〈담천과 국각〉, 〈애국 역사가 담천〉을 발표하였다. 특히 연구자료의 간행과 역사지식
의 보급에 진력하였고, 《중국역사소총서》, 《외국역사총서》를 출판하였다.
1957년에 중국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하였고, 1958년에 모택동이 “해서(海瑞)의 정신을 배
울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뒤로, 이에 호응하여 〈해서가 황제를 욕하다(海瑞罵皇帝)〉,
〈해서를 논함(論海瑞)〉, 《해서파관(海瑞罷官)》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해서파관》이
경극(京劇)으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게 되자, 강청(江靑)과 임표(林彪) 일파의 공격 목표가
되어 ‘반당·반사회주의의 큰 독초’로 낙인찍히고, 오함 자신은 ‘반공(反共)의 수완가
〔老手〕’ ‘반도(叛徒)’ ‘특무(特務)’로 몰렸다. 그리고 역사 속의 해서라는 인물을
통해 1959년 여산(廬山)회의에서 모택동을 비판했다가 면직된 팽덕회(彭德懷)를 옹호하고
있다는 혐의를 4인방으로부터 받았다. 오함 비판의 최종적인 목표는 당내의 ‘자본주의의
길로 가고자 하는’ 이른바 주자파(走資派) 팽진, 등소평(鄧小平), 유소기(劉少奇)와 같은
실권파의 숙청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오함은 1968년에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1969년에 옥사하였다.
사실 《해서파관》은 오함이 저명한 경극(京劇)배우 마연량(馬連良)의 의뢰를 받아 쓴 희곡
이고, 역사학자 오함의 대표적인 저서는 어디까지나 《주원장전》이다. 저자가 〈자서(自
序)〉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이 《주원장전》은 네 번 개작되었다. 1944년에 《바리때〔僧
鉢〕에서 황권(皇權)까지》(일명 《명태조전》)라는 서명으로 초판본을 출간하였는데, 정
치 현실에 대한 울분을 발산하고 원고료 수입을 생활비에 보태려는 동기가 있었다고 한다.
다시 내용을 대폭 수정하고 분량을 두 배로 늘린 다음 《주원장전》으로 서명을 고쳐 1949
년 두 번째로 출간하였다. 1954년에 세 번째로 다시 내용을 고쳤으나, 신중을 기하는 의미
에서 정식 출판을 하지 않고 백여 권만 찍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1964년에 병으로 휴양하는 기간에 네 번째로 고쳐 쓴 것이 바로 이 번역본의 저본(底本)이
다.
정치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오함은, 초기에 현대중국의 혁명을 염두에 두며 주원장이라
는 역사인물을 묘사하려는 의욕을 비교적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는 주원
장을 장개석에다 투영시키며 부정적인 면을 크게 부각시키다가, 여러 차례 고쳐 쓰는 과정
에서 주원장의 긍정적인 면도 점차 강조하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뀌어 갔다. 그런데 고
쳐 쓴 주원장의 이미지가 이번에는 오히려 모택동과 닮게 그려졌다고 비평하는 사람도 나오
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의 이른바 ‘영사사학(影射史學)’은 현대 중국 역사학의 커다란 병
폐 가운데 하나로서, 오함도 결코 그 시대의 큰 조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오함은 문화대혁명 속에서 필화(筆禍)의 형식으로 모택동과 4인방에게서 비판을 받고
옥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는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이 문자를 트집잡아 수많은 문
인·관료를 처형했던 이른바 문자옥(文字獄)을 연상시킨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쓴
《주원장전》에 대해 한때 큰 관심을 표명한 일도 있었던, 바로 그 모택동과 4인방에 의해
서 …….
역자가 《주원장전》을 처음 읽은 것은 대만대학(臺灣大學)에 유학하고 있던 1972년 무렵이
었다고 기억된다. 냉전이 지속되고 있던 시대, 국민당정부 통치의 당시 대만에서는 대륙에
서 출간된 서적은 모두 금서(禁書)로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학술적으로 중요
한 서적은 저자의 이름을 바꾼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몰래 영인(影印)이 되어 더러 읽히고
있었다. 이 무렵 역자가 읽은 《주원장전》은 저자가 오진백(吳辰伯)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는 물론 대만의 출판사가 ‘오함’이라는 저자 이름을 살짝 가리기 위해 ‘진백’이라는
그의 자(字)를 대신 썼기 때문이다. 1972년에 대만에서 영인된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의 저본
은 1949년에 출판된 오함의 두 번째 《주원장전》이었다. 기숙사에서 늦은 밤까지 이 두 번
째의 《주원장전》을 흥미진진하게 읽던 기억이 새로우며, 종이 색깔이 바랜 이 책은 지금
도 역자의 연구실 서가에 꽂혀 있다. 그 뒤 1980년대 초에 오함의 네 번째 《주원장전》이
우리 나라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역자는 1984년 무렵 고려대학교에서 이 네 번째 고쳐 쓴
《주원장전》을 텍스트로 삼아 대학원생들과 토론을 진행했던 일도 있었다.
오함의 《주원장전》이 출간된 뒤로 주원장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어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
고, 단행본도 중국·대만·일본에서 적어도 9종 이상이 나왔다. 그러나 오함의 《주원장전》
은 유물사관(唯物史觀)에 바탕하여 저술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연구사에 길이 남을 고
전적 연구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함이 네 번째로 고쳐 쓴 《주원장전》은
1965년에 삼련서점(三聯書店)이 출판한 이래, 1985년 인민출판사(人民出版社)가 다시 출판
하였고, 2000년에는 또 하북교육출판사(河北敎育出版社)가 『20세기 중국사학명저(二十世紀
中國史學名著)』 시리즈의 하나로 다시 출간하는 등 중국에서는 끊임없이 간행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오함의 《주원장전》에는 현실의 인물을 의식한 ‘영사사학(影射史學)’이라든
지, 지나치게 경직된 유물사관의 적용 같은 결함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 시대적 분위기
에 짓눌린, 아니 어쩌면 영합한 듯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저자의 이러한 경향을 가
지치기한다면 《주원장전》은 역시 사료(史料)에 충실한 하나의 엄밀한 역사연구서이다.
이러한 몇 가지 결함이 있다 할지라도 역자가 오함의 《주원장전》을 굳이 번역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중국사의 시각에서 계급투쟁론을 중심으로 한 《주원장전》의 한계
를, 한국의 원명사(元明史) 연구자들이 더 넓은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앞으로 확실히 뛰어넘
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역사서와 비교해 볼 때, 《주원장전》은 마치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
이다. 그러나 《주원장전》의 초판본 제목 《바리때〔僧鉢〕에서 황권(皇權)까지》가 암시
하는 것과 같이, 이 책이 단순히 주원장의 입신출세 이야기로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주원장의 일생을 그린 전기(傳記)를 통해, ‘역사인물평가’문
제를 비롯한 숱한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원말명초(元末明初)의
14세기, 나아가서는 원명시대(元明時代) 중국의 역사를 폭 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준
다.

2003년 2월 19일
박 원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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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自序)




나는 《주원장전》을 전후 20년 동안에 네 차례 고쳐 썼다. 이것은 최근에 다시 고쳐 쓴 제
4판이다. 제1판은 《명태조전(明太祖傳)》이라는 제목으로 1944년 6월에 출판하였고, 제2판
은 《주원장전(朱元璋傳)》으로 이름을 고쳐 1948년 8월 탈고하고 다음해 4월에 출판하였
다. 제1판과 제2판의 내용에는 모두 오류가 많았으며, 어떤 곳에서는 커다란 잘못을 저질
러 놓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나는 그 무렵 나 자신의 초계급사상(超階級思想)에 바탕하여, 불굴의 서계 홍건
군(西系紅巾軍) 조직자인 팽형옥(彭瑩玉) 스님에 대해 서술하면서, 경솔하게도 불충분한 사
료(史料)에 근거하여 그가 공을 세운 뒤 물러났던 것으로 여겨 찬탄하기를 마지않았고, 혁
명은 중도에 그만둘 수도 있으며 끝까지 혁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 잘
못된 관점에 대해 나는 해방구(解放區)로 들어온 뒤로 이론상의 계발(啓發)을 받고 나서야
잘못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다음해 2월, 북경으로 돌아온 뒤 분발하여 다시 공부를 하면서
과연 과거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였던 것, 즉 팽형옥은 끝까지 싸우다가 원나라 군대에게
피살당했다는 사료를 찾아내게 되었다. 둘째, 나는 그때 레닌의 국가에 관한 학설을 몰랐으
므로 국가기구는 오직 관료와 군대뿐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이를 봉건황권(封建皇權)의
두 수레바퀴로 비유하였던 것이다. 셋째, 당시 반동(反動)통치의 장개석(蔣介石)집단에 대
한 증오심 때문에 주원장을 장개석에 비추어 서술하였다. 한편으로는 역사에서 주원장이 응
당 누려야 할 지위를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뽕나무를 가리키며 오얏나무를 욕한
다〔指桑罵槐〕”는 식으로, 역사에서 비교적 뛰어난 봉건제왕(封建帝王)인 주원장을 지나
치게 매도하여, 실제와는 맞지 않는 평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비교적 큰 잘못이
지적되었으나, 제2판이 이미 상해(上海)에서 출판되어버렸다. 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고쳐
쓰기로 마음먹었지만, 공무가 너무 바빠 온전한 시간을 좀처럼 만들지 못하여 5년을 끌게
되었다.
1954년 4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을 굳히고 시간을 내어 다시 쓰기 시작하였는데, 틈
이 있으면 조금씩 쓰며 끊어질 듯 이어가다가, 꼬박 1년이 걸려 겨우 다 쓴 것이 제3판이
다. 이론적인 수준이 낮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고 자신감도 없었으므로, 1백여 권만을 등사
하여 각 분야의 친우들에게 나눠 보내고 가르침을 요청하였다. 1년이 지나는 동안 과연 적
지 않은 결점과 오류를 지적하여 주는 수많은 서신을 받게 되었다. 제3판의 주요 결점과 오
류는 계급관계·계급모순·계급분석에 대한 주의가 모자랐고, 주원장이라는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도 전면적이지 못하였다는 데에 있었다. 다시 9년 동안의 학습을 거치며 몇 가지 문제
점에 대해서는 예전보다 좀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특히 계급·계급분석·계급투쟁과 역사
인물평가 문제에 관해서는 비교적 공을 들여 공부하며 몇몇 짧은 글을 써보기도 하였다.
그 무렵 많은 독자들이 오래 전에 절판된 《주원장전》을 언제 다시 출판하게 되느냐고 편
지로 물어 왔다. 독자들에게 이미 퍼져버린 잘못된 논점을 바로잡아 주고, 또 주원장이라
는 이 역사인물에게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기 위하여, 병을 앓아 휴양하는 틈을 타서 이를
네 번째로 고쳐 쓰게 되었다. 올해 2월초부터 시작하여 매일 조금씩 써 나가서, 두 달이 지
나 마침내 쓰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 책을 다시 쓴 목적은 이 구체적 인물에 대한 서술을 통하여, 이 인물이 처해 있었던 시
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구체적 인물에 대한 총결산을 통하여, 역사인물평가의 표
준과 척도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이 시대 연구에 관해 나 스스로 초보적 인식을 얻고자 하
는 것도 당연히 포함된다. 내가 이 시대를 연구하는 데 이미 지난 30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할지라도 내가 지니고 있는 지식은 아직 매우 한정되어 있고 이론적 수준도 역사지식에 비
해 뒤떨어져 있다. 공부에는 끝이 없고 잘못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니, 독자들의 비평과 가르
침을 바라는 바이다.
이 밖에 한 가지 덧붙여 말하고 싶은 문제는 이 책 속에서 원말 농민대봉기를 일으킨 농민
군을 홍군(紅軍)으로 부르고 있는 점이다. 원말의 농민봉기군은 적군과 구별하기 좋고 우군
을 알아보기 쉽게 하기 위해, 봉기할 때 머리에 모두 붉은 두건을 동여매었으므로, 당시 사
람들은 그들을 홍군(紅軍)이라고 불렀다. 홍건군(紅巾軍)이나 향군(香軍)으로도 불렀으나
문헌자료에 바탕하여 말한다면 홍군이라는 호칭이 비교적 보편적으로 쓰였다. 홍군의 적인
몽한(蒙漢)통치계급·지주·향신·유생들은 그들을 매도하여 ‘홍구(紅寇)’, ‘홍적(紅賊)’
이라고 불렀다. 거꾸로 지주계급이 조직한 군대를 스스로 ‘민병(民兵)’, ‘민군(民
軍)’, ‘의군(義軍)’ 또는 ‘의병(義兵)’, ‘향군(鄕軍)’ 등으로 불렀고, 또 입고 있
던 복장에 따라 청군(靑軍)이나 황군(黃軍) 따위로 부르기도 하였다. 매우 분명한 것은
‘민병’, ‘민군’에서 ‘민’이란 틀림없이 지주를 가리키는 것이고, ‘의군’, ‘의병’
에서 ‘의’도 지주계급의 ‘의’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내친 김에 지난 일을 한 가지 얘기하고자 한다. 1941년 내가 곤명(昆明)의 서남연합대학(西
南聯合大學) 역사계(歷史系) 교수로 있을 때, 중경(重慶)의 ‘국립편역관(國立編譯館)’이
나에게 《명사(明史)》 한 권을 써 달라는 부탁을 했다. 다 쓴 일부 원고를 보냈더니 얼마
쯤 지난 뒤에 반환되어 돌아왔는데, 원고 속에 쪽지가 하나 붙어 있었다. “홍군의 봉기는
‘민군의 봉기’로 고쳐야 할 듯함. 이하 일률적으로 고쳐 주기를 바람. 동방(東方), 1,
14.”(이 원고와 쪽지는 오늘날까지도 내가 보관하여 기념으로 삼고 있음) 그 뜻은 내가
한 글자, 즉 홍(紅)을 민(民)으로만 고친다면 원고를 출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
는 크게 화를 내었다. 그 이유는 첫째, 국민당은 공산당이 영도하는 홍군을 두려워하기 때
문에 거의 6백년 전의 홍군마저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두려워해도 좋다, 그래 계속 두려워
하게 내버려두자. 내가 책을 못 내면 못 내었지 이 글자는 절대 고칠 수 없다. 둘째, 위에
서 말한 것과 같이 ‘민군’은 당시 지주계급이 조직한 무장병력으로서 홍군과 대적하는 군
대의 호칭인데, 홍군을 ‘민군’으로 바꾸면 두 적대적인 군대가 뒤바뀌어 홍군이 지주군대
가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정말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을 수 있으며, 참으로 커다란 웃음거
리가 아닐 수 없다. 이 11글자의 쪽지로서 나는 국민당 학자 패거리들의 정치와 학술 수준
을 알았으며, 더 이상 상대하지 않기로 하고 이 원고는 출판하지 않았다.
이 조그마한 일화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 뒤로 나의 정치생활에도 적극적인 의
의를 지니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 책에서도 홍군이라는 명사를 그대로 쓰고 있으니, 독
자들께서도 널리 이해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1964년 4월 7일, 북경에서
오 함
 서 평 / 저 자(편 집 부)로부터의 글
+기획포인트+

소설처럼 읽기 쉬운 주원장 일대기와 원말명초의 역사

흔히들 일반 대중이 역사나 철학과 같은 학문들에 쉽게 다가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어제오
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많겠지만 내용에 대한 선이해(先理解)가 필요하고 또
한 내용 자체가 어렵게 쓰여 있다는 것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런 문제를 조금이나마 극복하여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렇지만 결코 가볍지 않
은 역사책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이 책이 번역되어 만들어졌다.
이 책의 원본(原本)은 오함의《주원장전》이다. 오함의《주원장전》은 주원장의 전기(傳記)
이지만 사료(史料)에 근거한 원말명초의 역사를 종합하여 주원장의 전기를 서술한, 지금은
고전이 된 역사서이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을 중심으로 원말명초의 역사상(歷史像)을 그리는 데 길잡이로서 이
책은 큰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주요내용+

원말명초에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주원장(朱元璋, 명나라 태조)의 일대기

주원장은 원나라 말기에 태어나 홍군(紅軍)에 들어가 차츰 군웅의 대열에 오르면서 마침내
는 중국을 통일하고 명왕조를 세우는 황제가 된다.
원나라 말기 지배계급인 몽한(蒙漢)관료지주들이 농민에게 잔혹한 착취와 무자비한 압박을
가하자, 참다 못한 농민이 무기를 손에 들고 여러 지역에서 들고 일어난다. 이들 홍군들을
막지 못한 원나라는 점차 무너져 가고 주원장은 홍군에서 그 지위가 점차 높아져 간다.
주원장은 원나라와 홍군들 사이에서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여러 군웅들을 물리치고 명나
라를 세운다. 주원장은 황제가 된 뒤 30년 동안 황제로 있으면서 10만 명 이상의 지주와 관
료들을 숙청하고
황제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군주독재체제를 확립시켜 나간다.
71세로 죽은 주원장과 그를 둘러싼 시대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목    차
차 례


역자 해설 : 오함(吳?)과 《주원장전》 11
자서(自序) 17
제1장 유랑 청년 23
1. 어린 행자(行者) / 24
2. 행각승(行脚僧) / 36
3. 홍군(紅軍)의 봉기 / 50
제2장 홍군(紅軍)의 대장 83
1. 구부장(九夫長) / 84
2. 소군관(小軍官) / 91
3. 대원수(大元帥) / 112
제3장 오국공(吳國公)에서 오왕(吳王)으로 135
1. 파양호(?陽湖)의 결전 / 136
2. 동오(東吳)를 취하고 / 159
3. 남정북벌(南征北伐) / 184
제4장 개국(開國) 황제 209
1. 국호를 대명(大明)으로 / 210
2. 남북통일과 대내외(對內外) 정책 / 221
3. 수도 건립과 북변(北邊)의 방어 / 234
4. 중앙집권의 강화 / 242

제5장 정권의 기둥 255
1. 지주·관료와 인민의 의무 / 256
2. 상비군과 특무 조직 / 287
제6장 사회생산력의 발전 307
1. 농업생산의 회복과 발전 / 308
2. 면화의 보편적 재배와 수공업·상업 / 326
제7장 통치계급의 내부모순 347
1. 호유용(胡惟庸)사건과 남옥(藍玉)사건 / 348
2. 공인(空印)사건과 곽환(郭桓)사건 / 365
3. 문자옥(文字獄) / 380
제8장 가정생활 395
1. 많은 아내와 자손 / 396
2. 사상과 생활 / 410
3. 고달팠던 일생 / 423
주석 433
주원장 연표(年表) 471
원명(元明) 관직표 487
찾아보기 491
 저  (역)   자   약   력
지은이 : 오함(1909-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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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청화대학 역사계를 졸업하고 조교로 명사(명나라 역사) 강의
1937년 운남대학, 1938년 서남연합대학 교수
1949년 청화대학 역사계 주임교수, 문학원장, 북경시 부시장
1968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투옥 당함
1969년 60세에 옥사함
1979년 사후 10년 만에 복권되고, 성대한 추도회가 거행됨
1984년 《오함전》(소쌍벽, 왕광지, 북경출판사)
《오함기념논문집》(북경시역사학회 편, 북경출판사)
《오함사학논저선집》(북경시역사학회 편, 인민출판사)이 출간됨
저 서 《독사찰기》(삼련서점, 1956),《투창집》(작가출판사, 1959),
《동하집》(삼련서점, 1960), 《춘천집》(작가출판사, 1961)
《해서파관》(북경출판사, 1961), 《명사간술》(중화서국, 1980)
《학습집》(북경출판사, 1980)


옮긴이 : 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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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만대학과 동경대학에서 수학.
현재 고려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저 서 《명말청초사회의 조명》(공저, 한울아카데미)
《명초조선관계사연구》(일조각),
《명청휘주종족사연구》(지식산업사)
역 서 《중국근현대사》(지식산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