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 정치사연구
 
 도서분류 한국사
지은이 : 최승희
옮긴이
면 수 : 510
:  \27,000
출간일 : 2002/08/23
판 형 : 신A5
ISBN : 89-423-106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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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주문권수 입력:
 책 의   줄 거 리 ( 머 리 말 )
책머리에

政治史硏究의 대상은 국왕과 관료 및 인민의 존재양태, 국정의 제도적 틀인 정치체제, 국정
운영의 실제, 정치세력의 동향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초기의 정치사를 보면, 각 王
代마다 정치체제에 차이가 있었고, 왕의 명분 정통성의 유무, 왕의 자질 통치력(왕권)의 여
하, 그리고 그 王代 관료들의 자질과 충직성 여부에 따라서 국정의 내용이 좌우된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정치 지도자의 정통성 자질 통치력 및 정치노선의 여하와 관리들의 자
질 충직성 여하에 따라서 민심의 향배와 국정의 안정 여부가 크게 좌우되는 것을 본다.
조선초기 정치사연구에서 첫째 대상은 왕위의 명분 정통성 여부와 왕권의 강약 여부가 될
것이다. 왕위의 명분과 정통성문제는 주로 太宗代와 世祖代가 대상이 되겠고, 왕권 문제는
모든 왕대에 관계된다.
정치체제는 정치의 제도적 틀로서 국정운영의 방식을 결정짓는 것이다. 조선초기 정치체제
는 개국초에는 都評議使司制를 채택하였고, 태종 이후에는 議政府 6曹體制가 근간이 되었으
나 때로는 의정부서사제를 쓰기도 하였고 6조직계제가 중심이 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의
정부서사제와 6조직계제를 절충하기도 하였고 변칙적인 체제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
은 정치체제의 변동은 왕권의 강화와 관련되기도 하였고, 정치변동과 관련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정운영체제의 변동은 정치사연구의 한 대상이다.
정치세력의 동향은 정치사연구의 중요한 대상이다.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정치세력의 존
재 여부, 대립되는 정치세력의 유무 여부는 그 시대 정치사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면 조선초기에는 어떠한 정치세력이 존재했는가.
태조대의 정치세력으로 상정할 수 있는 것은 52명의 開國功臣과 30명 전후의 都評議使司 임
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개국공신은 태조가 선정하였으나 그들의 출신 신분 직업이 다양하
고 또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른 여러 성향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므로 하나의 정치세력으
로 결집될 수 없었다. 또한 도평의사사의 임원들은 고위관료로서 국정운영에 참여한 것이었
으므로 그들을 하나의 정치세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태조는 趙浚 鄭道傳 南誾 등 개국공
신 출신의 몇몇 宰臣들을 중용하였으므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기는 하였으나 그
들이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鄭道傳 등은 康氏所生 芳碩을 世子로 擁衛
하고 상당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하나의 정치세력을 이루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개국의 공이 크면서도 공신에 들지 못한 芳遠은, 방석을 옹위하고 있는 정도전 등에게 불만
을 품었을 것은 틀림없지만, 방원을 중심으로 하나의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방원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면모를 보면, 芳果 芳
毅 芳幹 李和 李伯卿 李良祐 沈悰 李居易 李叔蕃 閔無咎 閔無疾 趙英茂 馬天牧 趙璞 辛克
禮 徐益 文彬 沈龜齡 등이다. 즉 韓氏所生 王子들과 宗親, 芳遠의 妻男들과 姻戚, 芳遠系武
人 몇 명 등이 모두였고, 개국공신으로는 종친인 李和와 趙璞뿐이었다. 이들은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결집되기는 어려운 인적 구성이다.
遼東征伐計劃을 둘러싸고 정도전 남은과 조준 사이에 대립이 있었으나 그것은 고위관료 사
이의 政見 차이 때문이었지 정치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남은 등의 동조세력으로 몰려 화를 당한 개국공신은 李濟(방석의 매
부), 沈孝生(방석의 장인), 李稷(李濟의 종형), 張至和(방석의 인척), 李懃 등이었는데, 이
들은 모두 세자 방석의 인척들이었다. 또한 정도전 등의 동조세력으로 지목되어 화를 당한
承旨 盧石柱 卞仲良, 宦官 金師幸 曺恂, 贊成 柳曼殊, 都鎭撫 朴 , 南贄(남은의 동생), 李
茂(中立) 등이 있으나 이들은 전체 官僚群 가운데 아주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太祖代에는 정도전도 방원도 하나의 뚜렷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太宗은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어떠한 정치세력도 인정하지 않았다.
태종은 그의 공신(定社 佐命공신)들의 개인적인 권리와 특전은 인정하였으나 그들이 정치세
력화하는 것은 견제하거나 제거하였다. 그는 처남인 閔無咎 無疾 無恤 無悔와 그 동조세력
까지 모두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자에 逢迎하는 관료들도 反王 親世子세력으로 간주하
여 제거하였다. 태종대에는 왕에게 충성하는 관료만이 용납되었다.
세종대에도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나 서로 대립되는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
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뒤 世宗妃 沈氏(昭憲王后)의 아비 沈溫을 제거한 것은 戚族勢
力의 싹을 미리 자르기 위한 것이었다. 黃喜와 같은 사람은 세종대에 20여 년 동안 정승 자
리에 있었으나 그와 관련된 정치세력은 없었다. 集賢殿 출신 儒臣들이 다수 배출되었으나
그들은 충성스러운 학자였을 뿐,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는 않았다.
世祖는 명분과 정통성에 흠이 있었기 때문에 즉위초부터 왕권강화에 힘썼고, 反王勢力을 철
저히 제거하였다. 반왕세력은 그의 공신(靖難 佐翼功臣) 가운데도 있었고, 드러나면 거침없
이 제거되었다. 韓明澮 申叔舟 權擥 등은 세조공신으로서 權臣化했으나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는 없었고, 鄭麟趾 鄭昌孫 등도 정승으로 있는 동안 不敬하고 無禮한 말을 했다는 죄로
파직을 당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세조공신들은 세조 앞에서 할 말을 다하지 못하였고,
기를 펴지 못하였다. 세조대에는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존재할 수 없었고, 정
치적으로 대립하는 정치세력도 없었다.
睿宗이 즉위하면서 세조공신들은 勳舊大臣으로서, 또한 院相으로서 정치권력을 잡게 되었
다. 그러나 예종은 재위 1년 여 만에 승하하였고,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貞熹王后(世祖妃)가 攝政을 하였고, 훈구대신(세조공신, 성종추대공신)들이 원상으로서 國
政을 署事하게 되어 훈구대신들이 막강한 정치세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성종 7년 5월 원
상제가 혁파된 뒤에도 勳舊 戚族세력은 여전히 막강한 정치세력으로 남았고, 그들의 불법
과 비리가 드러나면서 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그들의 정치적 위상은 변함이 없었다. 성종
10년대를 전후하여 차츰 영남의 사림출신들이 3司를 중심으로 官界에 진출하면서 훈구세력
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등장하였으나, 아직 그 세력은 勳戚勢力에 대립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선초기에는 정치이념과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대립한 정치세력은 크게 드러나지 않
았으므로 필자는 왕권을 둘러싼 문제, 그 시대 정치의 틀인 정치체제, 국왕과 관료들의 화
합으로 이루어지는 국정운영의 실제 등을 대상으로 삼았음을 밝혀둔다.
참고로 이 책에 실은 논문의 제목과 게재지, 발표연도는 다음과 같다.

〈朝鮮太祖의 王權과 國政運營〉,《震檀學報》64, 1987
〈太宗朝의 王權과 國政運營體制〉,《國史館論叢》30, 1991
〈太宗末 世子廢立事件의 政治史的 意義〉,《李載 博士還曆紀念論叢》, 1990
〈世宗朝의 王權과 國政運營體制〉,《韓國史硏究》87, 1994
〈世宗朝 政治支配層의 對民意識과 對民政治〉,《震檀學報》76, 1993
〈世祖代 王位의 脆弱性과 王權强化策〉,《朝鮮時代史學報》1, 1997
〈世祖代 國政運營體制〉,《朝鮮時代史學報》5, 1998
〈成宗朝의 國政運營體制와 王權〉,《朝鮮史硏究》10, 2001

위의 논문들은 15년 동안에 걸쳐 발표한 것이다. 내용은 처음 발표한 대로 실었고, 용어와
오자를 약간 고쳤을 뿐이다. 왕대별로 왕권문제와 국정운영체제를 중심으로 다루다보니 지
리함을 면치 못하였다.
끝으로 이 논고들을 묶어 간행하는 일을 쾌히 승낙해주신 지식산업사 金京熙 사장님께 감사
를 드리며, 묵은 논문을 새로 입력하는 데 수고해준 국사학과 대학원의 이응주 군, 장지연
양, 강호선 양, 김진영 양, 이현진 양, 유현재 군, 그리고 교정과 색인작업을 해준 양진석
군, 이재희 군, 김경숙 양, 노영구 군 등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 또한 이 책을 규모
있게 다듬고 품위 있게 만들어주신 지식산업사 편집부 여러분께도 감사를 드린다.

2002년 8월 1일
鵲峴에서 저자
 서 평 / 저 자(편 집 부)로부터의 글
이 책은 저자가 1976년에 발표한《朝鮮初期 言官․言論硏究》에다가〈集賢殿硏究〉,〈集賢
殿官의 言官化〉,〈弘文館의 成立經緯〉,〈弘文館의 言官化〉,〈弘文錄考〉 등을 더하여 묶
어 낸 것이다. 다시 말해《朝鮮初期 言官․言論硏究》의 증보판의 성격을 지니는데, 그뒤
에 계속된 연구 성과들을 보탬으로써 저자의 학문적 맥을 짚는 데 더 없이 좋은 책이다.

조선시대 言論의 방법은 오늘날 매스컴과는 크게 달랐으나 언론의 목적은 같은 것이었다.
즉, 그 시대의 정치와 사회의 여러 가지 부조리를 바로잡고 이상적인 정치․사회를 구현하
도록 하는 데 언론의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그런 언론은 정치에 반영되어야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언론의 방법은 옛날과 오늘날이 다르다. 오늘날의 언론은 주로 매스컴을 통하여 여론을 일
으켜 정치나 정책에 반영시킴으로써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이지만, 조선시대의 언론의
통로는 오로지 왕에게 올리는 길뿐이었다. 왕에게 올라간 언론은 朝臣들의 의견이 참고가
되어 정치나 정책으로 구현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관료층과 유생층이
상소로 언론을 할 길이 있었으나, 상소의 방법과 절차가 까다롭고 기성의 관료집단이나 정
치권력으로부터 제재를 받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언론을 펼 수 없었다.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나 천재지변 또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求言의 방식으로 조정 안팎의 大小官
僚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언론할 기회를 광범위하게 주었으나, 그것도 형식적이고 미봉적
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로 모든 층이 자유롭게 언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
다. 조선 초기에 신문고 제도가 있었지만 그것은 대개 개인적으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
기 위한 것이었지, 넓은 의미의 언론이라고 부르기에는 문제가 있었으며 또한 큰 효과를 거
둘 수 없었다. 결국 조선 초기의 언론은 이를 직무로 삼는 言官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
다.
조선 초기 언관의 사명은 정치적 안정 위에 유교정치와 유교사회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정치
의 방향을 유도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언관의 언론은 어느 시기나 똑같은 권위로 정치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그 시대의 정치사회적 분위기, 왕권의 강약, 군
주의 인품과 자질, 군주의 언관에 대한 자세, 강력한 정치세력의 유무, 언관의 자질과 사명
감의 충실 여하 등에 따라서 언관의 언론 활동과 그 성과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책은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홍문관과 같은 ‘언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기
관과 구실에 관한 연구들을 담고 있다. 아울러 학술기관으로 출발한 집현전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정치적인 성격의 기구가 되고, 언관화의 경향을 띠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조선왕조실록》을 주된 자료로 삼아 그 당시의 언론기관의 양상을 재구성하였다
는 점에서 앞으로 고문서를 통한 역사 연구에 큰 표본이 될 것이다.
 목    차
차 례
책머리에·3

Ⅰ. 朝鮮 太祖의 王權과 國政運營 11
머리말·11
一. 功臣의 選定과 王權 / 13
1. 開國功臣의 選定 / 13 2. 原從功臣의 選定 / 19
二. 都評議使司의 機能과 王權 / 23
1. 國政의 上達 / 24 2. 王命의 奉行 / 26
三. 國政運營과 王權 / 29
1. 王命에 따른 施政 / 29 2. 小數 宰臣 중심의 정치 / 32
3. 各司 奏達의 裁決 / 43 4. 臺諫 言論의 利用 / 45
맺음말·49
[附 錄]·52

Ⅱ. 太宗朝의 王權과 國政運營體制 61
머리말·61
一. 王位의 脆弱性과 王權强化策 / 62
1. 王位의 脆弱性 / 62 2. 王權强化策 / 72
二. 國政運營體制 / 87
1. 都評議使司體制에서 議政府體制로 / 87 2. 都評議使司的 合坐制의 存續 / 88
3. 小數 宰臣中心政治의 存續 / 90 4. 王命에 의한 政治 / 91
5. 議政府와 各司의 啓 上疏 / 92 6. 議政府 6曹 臺諫 등의 擬議 / 98
맺음말·102






Ⅲ. 太宗末 世子廢立事件의 政治史的 意義 105
머리말·105
一. 太宗王位의 脆弱性과 王權强化의 緊迫 / 106
二. 世子  의 失行과 品位損傷 / 114
三. 忠寧大君의 浮上 / 124
四. 世子의 廢立과 그 의의 / 127
맺음말·134

Ⅳ. 世宗朝의 王權과 國政運營體制 137
머리말·137
一. 世宗王位의 名分 / 138
二. 王權의 확립 / 143
1. 上王權에 의한 王權의 제약 / 143 2. 上王 死後 王權의 확립 / 150
三. 國政運營體制 / 154
1. 6曹直啓制下의 국정운영 / 154 2. 議政府署事制下의 國政運營 / 178
맺음말·204

Ⅴ. 世宗朝 政治支配層의 對民意識과 政治 209
머리말·209
一. 世宗의 對民意識 / 210
1. 民本 爲民意識 / 210 2. 愛民 恤民意識 / 218
二. 官僚層의 對民意識 / 223
1. 民本 爲民意識 / 224 2. 恤民意識 / 231
三. 世宗朝의 對民政治 / 235
1. 卽位諭示와 求言 / 235 2. 監司 守令의 引見과 訓諭 / 238
3. 租稅負擔의  減 / 242 4.  役의  減 / 246 5. 貢物의 견감 / 250
6. 進上의 減省 / 253 7. 還上 賑濟의 시행 / 256 8. "欽恤之典"의 勵行 / 264
맺음말·268





Ⅵ. 世祖代 王位의 脆弱性과 王權强化策 271
머리말·271
一. 世祖王位의 脆弱性 / 272
1. 王位簒奪의 배경과 과정 / 272 2. 名分 正統 道德性의 결여와 그 영향 / 279
二. 王權强化策 / 300
1. 6曹直啓制의 강행 / 300 2. 中央集權의 강화 / 305 3. 親王勢力의 확보 / 308
4. 反王勢力의 제거 / 316 5. 親書政治의 勵行 / 317 6. 天祭의 設行 / 321
7. 言官 言論의 억압 / 322
맺음말·324

Ⅶ. 世祖代 國政運營體制 329
머리말·329
一. 6曹公事의 直啓 / 330
1. 6曹直啓制 단행 / 330 2. 6曹直啓制의 운영실태 / 332
二. 功臣宰樞의 정치참여 / 335
1. 靖難 佐翼功臣의 정치참여 / 335 2. 少數功臣의 權臣化 / 337
三. 政治權力의 분산 / 343
1. 議政府의 정치력 약화 / 343 2. 6曹의 정치력 향상 / 345
3. 承政院의 정치력 향상 / 348 4. 宗親의 정치력 강화 / 350
5. 議政府와 6曹의 國政共助 / 350
6. 議政府 6曹 承政院 功臣 宗親의 國政同議 / 351
四. 世祖의 政治方式 / 353
1. 常參 視事 輪對 經筵 親講 / 353 2. 下敎 傳旨 召議事 命議事 / 355
3. 親書政治 / 362 4. 酒席政治 / 365
맺음말·374





Ⅷ. 成宗朝의 國政運營體制와 王權 377
머리말·377
一. 親政 前 國政運營體制 / 378
1. 國王의 日常業務 / 378 2. 大王大妃의 攝政 / 381 3. 院相의 國政署事 / 385
二. 親政 後 國政運營體制 / 398
1. 各司의 國政上奏 / 398 2. 王命의 下達 / 412 3. 經筵 講 後의 國政論議 / 420
4. 勳舊大臣의 國政擬議 / 436
三. 成宗王權의 脆弱性 / 444
1. 內政(後宮)의 紛亂과 廢妃事件 / 444 2. 勳戚 臺諫의 軋轢 / 447
3. 3殿 奉養의 負擔 / 451 4. 士林出身의 政治活動 限界 / 455
5. 西征 北征과 國力消耗 / 463 6. 人事의 不公正 / 471
맺음말·479

찾아보기·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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